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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후기] #4. 고려사 줄거리

by 꺄꺄꺄 2022. 5. 5.

10세기에 잠시 분열되었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이로써 한반도는 분열되지 않고, 단일 통일국가로 앞으로 약 5세기간 유지하게 된다. 정치체제는 신라에서 이어온 것이 아니라, 후고구려가 세워졌을 당시의 정치체제가 고려로 넘어오면서 유지보수된다.

5세기단위로 국가의 흥망성쇠가 반복되다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 5세기내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보이는 것이. 초기 1세기간 나라가 발전하면서 각종 정치체제라 구축이 되며 발전하고, 2세기는 안정화된 정치체계속에서 점점 사회가 고착화되며 모순이 발생하고, 이후 2세기간 그러한 모순을 억지로 버텨내가며 천천히 망조길로 접어들고, 마지막에 1세기는 그런한 모순을 부수고, 나라를 뒤업고자하는 의지가 커져서, 나라가 갈아엎어진다.

10세기: 고려의 발전
11세기: 거란과 여진
12세기: 문신과 무신
13세기: 원 간섭기
14세기: 신진사대부 등장


10세기: 고려의 발전

새로 나라를 개국한 왕을 보통 태조라는 칭호를 붙이고, 나라의 정치체제나 법전을 완성하면 성종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다. 고려의 첫 한 세기동안은 태조의 개국으로 시작하여, 성종의 통치 체제의 완성으로 끝난다.


고려말고도 다 함께 뒤집어진 주변 국가

10세기 들어서 묘하게 고려를 포함한 주변 국가 모두가 이 시기에 뒤집어졌다. 이전에 통일신라 때, 있었던 중국 통일 국가 당나라가 신라와 비슷하게 뒤엎어져서 멸망하고, 송나라가 대신 그 자리를 채웠다. 발해도 이 시기에, 북방 몽골에서 넘어온 유목민족 거란족에게 당해 멸망하게 된다. 발해가 있던 자리는 거란족이 일부 눌러 앉았고, 발해 유민은 일부 고려로 망명해오거나, 그 자리에서 발해의 정체성을 잃고 여진족으로 희석되고 만다. 고려는 여진족들에 회유와 동화책으로 일부 포섭하고, 이와 동시에 북진정책으로 한반도의 약 80%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매우 악감정을 가지고 있고, 거란에 대한 모든 호의를 거절하고 무시한다. 이에 송과는 친하게 지내며 통교를 한다.

11세기: 거란족의 1차 침입

거란족은 자기의 호의를 모두 무시하고, 송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고려에게 화가나서 쳐들어간다. 고려는 이에 노련한 혀놀림으로 거란을 납득시켰다. 송과 교류를 단절하고 거란과만 친하게 지내는 것을 요구하는 거란의 요구에 거짓으로 응하고, 압록강 동쪽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 것이 서희외교담판이다.

거란의 2차 침입

고려는 거란과 한 약속 다 무시하고, 여전히 거란을 무시하고 송과만 잘 지내는 고려에게 뿔이 났다. 마침 고려 내부에서 강조라는 자라 고려왕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하는 강조의 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거란은 고려는 마이베스트 프렌드라고하며, 마이베스트 프렌드가 불의에 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나름 거란은 이 때까지 무시당하고 살아왔던게 서러웠는지 고려를 있는 힘껏 쓸어버렸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고, 이때 고려왕 현조가 저기 아래 전라도 나주까지 피신하게하는 트라우마까지 선사하였다. 이때 현조는지방에 피난갔는데, 자기나라 왕도 못알아보고 좋지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이, 나중에 지방을 싹갈아엎어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조는 거란하게 잡혀 처형 당한다. 이 전쟁은 양규의 흥화진 전투로 거란의 보급로를 끊어 겨우 진정이 되었고, 거란은 현조에게 친조(입조) 약속을 받아내고 물러나게 된다.

거란 3차 침입

절대 이정도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고려, 거란의 말을 모두 잡수시고, 약속을 어기는 고려였다. 거란은 강동 6주도 반환을 요구하지만 역시 무시한다. 이번에 단단히 준비한 거 같은 고려. 거란이 쳐들어오 오자, 저번에 보급로를 끊었던 흥화진에서 뚝을 터트려 거란군을 쓸어버리고, 나머지 거란군은 귀주에서 쓸어버림으로 대 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쟁이 강감찬의 흥화진 전투와, 귀주대첩이다.


송-거란-고려 세력 균형 유지

이후 거란은 더이상 침입해오지 않았다. 혹시나 모르니 고려는 만일을 대비해 천리장성을 세운다. 그리고, 송, 거란, 고려는 세력을 유지하며 생각보다 아주 오래 평화로운기간을 보낸다. 거란의 칩임은 11세기 초 20년동안만 벌어지고, 나머지 11세기동안은 정말 아무런일도 없이 평화로운 날들만 지났다.

12세기: #1. 금의 건국

처음에는 고려를 형님의 나라로 모시며, 순박했던 여진족이 발해 멸망후 만주 지역을 떠돌며 거란족에게 숨을 죽이면서 지냈는데, 거란이 점점 쇠퇴의 길을 걷자, 점점 세력을 키우며 부족 통일을 이루고 힘을 가지고 사나워져, 고려 북방경계에서 난동을 부린다. 이에 고려는 유감을 표하며 여진을 때리지만, 생각보아 여진의 맷집이 강했다. 이에 고려는 별무반이라는 기병 군대를 창설해서, 제대로 여진을 혼내주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진에게 동북9성 지역을 압수하였는데, 여진이 두번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생떼를 부리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아히 동북9성 지역을 돌려주었다.

여진은 그 후로도 무럭 무럭 자라나서,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국을 건국하였다. 금국은 아주 막강해져서 눈에 뵈는게 사라졌다. 이 때까지 자신을 못살게 군 거란,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눈을 돌려 고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이라고 불러라”, 고려 조정은 난리가 났다. 부모와도 같은 고려에 좀 컸다고 형이라고 불러라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때, 왕도 아닌, 이자겸이란 자가 멋대로 금의 사대를 수용했다. 고려는 왕보다도 강한 권력을 가지는 자가 나온, 문벌 귀족 사회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자겸이라는 자의 행동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 송나라를 박살내어 송나라의 수도를 뺏고, 송나라는 쫒겨나서 저기 아래 남송이 되어버렸으닌까 말이다.

12세기: #2. 문신의 난

이자겸의 난

과거제를 도입한 고려는 여러 세대를 걸쳐, 중앙에 고위 관직을 배출을 가문인, 문벌 귀족의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문벌 귀족 중에서도 왕실과 연이은 외척관계를 맺으며, 왕보다도 큰 권력을 가지게 된 자, 이자겸은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을 하게된다. 이자겸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왕을 독살하려고 했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역으로 제거된다. 이 과정에서 왕궁이 소실이 되고, 왕권이 약화 되었으며, 이 사건이 일어난 현 고려 수도 개경을 불길하게 여기며, 서경으로 천도하자는 서경천도론이 대두된다. 이 사건을 이자겸의 난이라고 한다.


묘청의 난

서경으로 천도하자는 서경파, 묘청과 현 수도 개경에 그대로 머물자고 하는 개경파, 김부식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처음에는 서경으로 천도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듯하여, 묘청은 서경에 궁을 짓는듯 서경천도 준비를 다하였지만, 서경천도 계획은 좌절되게 된다. 묘청은 수틀려서 그냥 그 자리에서 나라를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이 된다.

12세기: #3. 무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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