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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후기] #3. 남북사 줄거리

by 꺄꺄꺄 2022. 5. 5.

본 포스팅은 한국사 뼈대를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최대한 다른 파트들의 살은 발라내고, 다른 파트의 살들을 붙일 수 있는 기준점 및 지도가 되는 뼈대 줄거리가 되는 것을 의도, 국가의 흥망성쇠를 인과적으로 풀어내는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7세기: 삼국 통일

7세기는 수.당 중국 통일국가가 생겨나고, 고구려는 수.당이랑 싸우고, 신라는 백제랑 싸우다가, 신라랑 당나라가 연합하고, 백제, 고구려 쓸어버리고, 마지막으로, 연합했던 당나라와 신라가 멸망한 국가의 땅갖고 싸우다, 신라가 어느정도의 한반도의 대부분의 지배권을 얻게 되는 삼국통일사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엄청 큰땅을 갖고 있었고, 그런 고구려가 멸망했으니, 당나라나 신라가 그 큰 옛 고구려 땅을 갈라먹기… 는 힘들고, 제대로 된 통제가 되지 못한 체 방치되고 있었다.

8세기: 발해 발생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이 지나, 8세기에 가까워 질 때 쯤, 옛 고구려 땅이였던, 만주 일대에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다. 이 국가의 중심 세력이였던 대조영이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잡혀있다가, 당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틈에 탈출하여 세운 신생 국가였던것이다. 이 때는 국호를 진국이라고 정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탈출한 대조영을 잡으려도 군사도 파견했으면서, 얼마안가 당나라가 정식국가로 인정해준 것이다. 이때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래 “군”왕으로 책봉하고, 이에 때라 국호도 발해로 변경하였다. 군왕이란 칭호는 사실 낮은 칭호임을 알려드린다.

발해와 주변 국가의 관계

당이 발해를 공식국가로 인정 해주었으나, 그래도 군왕으로 낮은 칭호로 주고, 이런 저런일로 충돌이 앚았다. 이 싸움에 신라가 휘말려서, 당나라의 요청으로 신라가 어쩔 수 없이 발해로 군사를 출격하는 일도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신라와 발해는 서로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던게 신기하다. 굳이 신라와 발해를 역사로 엮어서 공부할 필요가 없을 정도 말이다. 물론 발해역사가 너무 밝혀진게 없는게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희얀하게도, 발해는 일본이랑은 좋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자기네들이 고구려를 계승 표방하며, 일본과 수교를 시작한 사실이 있다.

9세기: 발해의 전성기

이후 발해와 당은 다시 친해졌다. 친해진 당은 다시 발해에게 발해군왕이라고 했던 칭호를 발해’국’왕으로 승격시켜주었다. 발해는 이것을 자랑하려는지 일본에게 자기가 고려 국왕이라고, 천손이라고 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살짝 가미한 자신감을 마구 표출했다. 살짝 일본은 이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긴 한다. 이후로 발해는 나라 정치체계도 잘 다듬어 나가고, 영토도 잘 확장해 나가면서 점점 융성해졌다. 나중에 9세기 들어서는 중국이 발해를 해동 성국이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10세기: 발해의 멸망

그러나 발해의 마지막은 아주 허망하게 짧게 기록되어있다.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던 시기 이후로 급격하게 나라가 쇠퇴했는지, 발해에 관한 이후의 기록이 좀처럼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발해의 마지막은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의해 발해가 멸망했다외엔 자세한 기록은 제가 배우는 기본서에는 없어야, 선생님!, 이후 발해 부흥 운동은 몇 차례 있었으나. 끝내 실패로 돌아간다.

8~9세기: 통일 신라

신라왕은 신라가 부자상속 업그레이드를 한 이후로 왕의 직계 자손으로 왕의 후보가 될 수 있는 신분을 성골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성골의 수는 줄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성골에 씨가 말라가던 때는 여왕이 왕을 하던 시기, 7세기, 한창 백제에게 호되게 피보고, 당나라와 동맹을 짓던 시기,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였다. 이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성골은 모두 소실되었다. 성골이 통치하던 시기를 신라 상대라고 한다.

8세기: 신라 중대

그 다음 왕의 혈통이 섞여 있는 신분을 진골이라고 하는데, 성골이 씨가 마르니, 진골들이 다음 왕이 되려고 분주해진다. 이 많은 진골 중에 7세기 삼국통일하는데 주력이 되었던, 김춘추, 무열왕이였다. 진골 무열왕이 오른 뒤로 왕위를 이어 받안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을 무열왕계 진골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열왕계 진골들이 통치하던 시기를 신라 중대라고 한다. 삼국통일한 후 이시기는 나름 평화로운 시기가 아닌가 싶다. 당나라와도 사이좋고, 발해도 뭐 별 탈 없고

9세기: 신라 하대

그렇게 잘 굴러가던 신라에도 흉조가 들었다. 무열왕계 진골 마지막이 되는 혜공왕이 나이도 다 채우지 못한채 어린나이 8살에 왕위에 즉위에 오르고 만것이다. 즉시 왕권은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왕위를 탐하는 다른 진골 귀족들이 난을 일으키는 사건이 잦아지며, 결국 어린나이의 혜공왕은 피살되고 만다. 이 때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왕이 바뀌는데, 이 진골들은 과거 4세기 내물왕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진골들이라고 하여, 내물방계 진골들이라고 한다. 내물방계 진골들이 통치하던 시기를 신라하대라고 하며, 내물방계 진골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면서, 나라안을 온통 어지럽힌 탓에 나라가 급겹하게 쇠퇴하고 만다.

10세기: 후삼국 시대

9세기 신라 하대에 접어들고, 내물방계 진골들끼리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신라 왕이 빠르게 1세기동안 무려 16번씩이나 갈치워진다. 부패한 통치와 약화된 지방 통제력으로인해, 각기 지방에선 세력을 키운 호족들이 판을 치게된다. 1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약 1.5세기전에 멸망한 국가,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을 주장한 세력도 생겨났다.

후백제

백제 옛 땅에서, 백제를 계승하고자한 후백제는, 신라에 대해 매우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백제가 부활한 듯하다. 그렇게 후백제는 정말 또 신라왕을 죽이고, 신라의 마지막이 될 신라왕을 마음대로 세워두기까지 하였다.

후고구려

옛 고구려가 있던, 북쪽에서도 고구려를 계승하고자한 후고구려도 나타났는데, 후백제와 마찬가지로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후고구려를 세운 왕은 너무 변덕스러워 국호도 자주 바꾸었고, 성질이 매우 고약하고, 난폭하였다. 이자가 바로 궁예이다. 얼마안가 바로 궁예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쫒겨나고, 그 자리는 태조 왕건이 앉게되었고, 국호도 고려로 변경하였다.

후삼국 통일

이전 후백제와 후고구려와는 달리 모든 것에 대해 자비로웠다. 고려는 발해가 멸망해서, 망명온자를 자비롭게 받아주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을 때도, 신라를 도와주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도와준 고려와 전쟁을 치렀지만, 자신의 아들이 권력욕에 눈이 멀어, 쫒겨나서 망명온 후백제왕도 자비롭게 받아주었다. 이러한 자비로운 고려의 모습에 신라왕은 자신의 모든 권력을 고려에게 안 받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신라는 전쟁없이, 고려에 흡수통일 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려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버지를 쫒아낸 후백제와 전쟁을 치른 끝에 무너뜨리고, 후삼국 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10세기 접어들자마자 생겨난 후삼국시대가 30년만에 고려에 통일 되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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