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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후기] #1. 삼국사 줄거리

by 꺄꺄꺄 2022. 5. 4.

지금은 AC 2022인데, 고조선은 BC. 2333?

현재년도는 2022년, 예수가 태어난 후 약 2000년이 흘렀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시작은 고조선부터이며,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 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무제왕의 침략해서, 장기간의 전쟁 끝에 멸망하였다.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고조선는 BC. 2333 ~ BC. 108으로 약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기원후는. 삼국사, 고려사, 조선사, 현대사를 거쳐 오늘날까지 오는데 약 2000년이 걸렸다. wow

약 5세기 단위로 뒤집히는 국가의 흥망성쇠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세기별로 어떤일이 일어났는가 기억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책에서도 세기로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도 많고,  연도를 바로 외우기보단, 세기를 먼저 외우는게 덜 수고스럽기도 하다. 근데 세기도 마냥 외우기보단, 우리나라 역사는 한 국가가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나면 5세기 단위로 흥망성쇠를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편한 느낌이다.

  • BC.23 ~ BC.1(22세기): 고~조선
  • BC.1 ~ AC.(4세기): 초기 여러나라 발생 및 성장
  • 4세기: 백제 전성기 (신라 내물왕 기틀을 마련)
  • 5세기: 고구려 전성기
  • 6세기: 신라 전성기
  • 7~8세기(2세기): 통일신라
  • 9~13세기(5세기): 고려
  • 14,15,16,17,18세기: 조선
  • 19세기: 현대.

삼국사의 초점: 부자상속/율령반포/불교수용 -> 한강유역

삼국사에서는 부자상속, 율령반포, 불교수용이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 부자상속: 권력의 집중으로 나라 운영하는데 사공이 줄어들어서 효율적이다.
  • 율령반포: 명시된 운영 지침 및 행정 프로세스는 효율적인 통제가 가능하게 한다.
  • 불교수용: 많은 인원을 단일화된 믿음으로 효율적인 지지율을 만들 수 잇다.

라고 나름 적어보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강성해진 국가는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줄 한강유역을 자치하려고 하는 양상을 보였다.

4세기: 백제 전성기

3세기 때, 고이왕이 한강 유역에 잘 살고 있던 목지국을 병합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백제는 한강을 활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쉬웠다. 이 때 다른 국가보다 먼저 율령반포 업그레이드를 찍을 수 있었다. 이로써 백제는 4세기때 전성기를 맞이하고 사방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이과정에서 고구려랑 황해도를 두고 전쟁을 치르다 그만, 고구려왕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된다. 이 때, 전성기를 이끌었던 백제왕은 근초고왕이였다. 이후, 백제 하지 않은 나머지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게 되는데, 근초고왕이 부자상속 업그레이드를 하고, 그 다음 왕 침류왕 때, 중국에 동진이란 곳에 온 한 승려, 마라나타 가 불교를 전래하고, 왕은 불교를 수용하였다.

5세기: 고구려 전성기

고구려 사람 대부분이 호기로운 사람들이고, 서로 자기 주장이 강한사람도 많았던 터인지, 2세기부터 부자상속 업그레이드 먼저 찍고, 권력을 하나로 집중시켰다. 그 업그레이드 하나 갖고도 꽤나 많은 일을 항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4세기 백제가 전성기를 맞이하였을 때,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고구려왕 고국원왕(사유)가 전사하고 말았다. 바로 다음 왕위를 이은 소수림왕 때, 중국과 수교를 맺는다. 백제가 동진과 수교를 맺은 것에 반에, 고구려는 전진과 수교를 맺었다. 이 수교 과정에서 고구려는 불교수용 업그레이드와 율령반포 업그레이드를 연이어 하게되었다. 그리고 5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는 싫어요. 신라 내가 살림. 인정?

백제가 그러했 듯,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맞이하자, 사방팔방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때, 아래에 있던 백제를 복수를 하려는 지, 백제를 마구 찔러 댔다. 다행이 아직 큰 피해를 입진 않았다. 그 당시 피해자는 백제왕 아신왕이고, 가해자?는 고구려왕 광개토대왕이다. 이에 반에 신라는 호기롭게 지원이나 침입해온 왜구로부터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묶이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야 죗값을 치러라. 백제: 신라야 한번만 도와줘.

하지만, 아직 제대로 복수를 하지 못한 고구려는 그 다음 고구려왕 장수왕(거련) 때, 제대로 복수하게 된다. 먼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백제에 가깝게 다가갔다. 이에 혼비백산한 백제는 다급히 옆에 있던 신라에게 가서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당시에 백제왕은 비유왕이였는데, 다행이 그 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음 백제왕 개로왕 때, 벌어졌다. 고구려왕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침략하여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백제왕이 전사하고 바로 그 뒤를 이은 문주왕이 급하게 한성을 버리고, 아래 웅진(공주)로 수도를 천도하게 되었다. 너무 빠르게 급습한 나머지 제대로 도움이 되주지 못한 신라, 그리고 앞으로 같이 할일이 있는 관계로 더욱더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결혼동맹으로써 다시 한번 동맹을 맺었다.

신라는 뭐했니?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덕분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여기까지 오면서 모든국가 업그레이드를 마쳤다. 신라는 사실 이 두 국가보다 먼저 건설됐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지리적으로 단절 되어있는 탓에 아무런 업그레이드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고구려와 백제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5세기 고구려 전성기 때, 신라는여

5세기 때,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 하고, 백제를 마구 찌르고 있을 때, 신라에 왜구가 쳐들어 와, 고구려가 대신 그 왜구를 물리쳐준 사실이 있다. 이후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고구려랑 수교하고 있던, 전진과 간접적으로 수교를 맺게 되었다. 그 대가로 고구려는 신라에게 인질외교를 통해 자기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했다. 이런 것은 조금 부당함을 느낀 신라는 고구려의 평양천도로 당황한 백제의 동맹 손길을 놓치지 않고 손을 잡았다. 이제 신라가 발전한 의지를 느끼고, 부자상속 업그레이드를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래하러왔는데, 아직 강력한 토착신앙을 믿고 있는 바람에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 뒤로 백제가 고구려에게 공격당하고, 다시 한번 결혼동맹의 손길을 뻗는 백제의 손을 잡아주고 많은 생각이 든 신라였다.

6세기: 신라 전성기

6세기, 지증왕 때, 마음을 고쳐 먹은 신라는 나라를 이거 저것 뜯어 고쳤다. 원래 국호는 사로국이였는데, 이때 신라라고 고친것이였다. 그리고 왕호도 이전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형식으로 계속 바뀌어 왔는데, 이때 왕이란 칭호를 쓰게 되었다. 열심히 중국문물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음 법흥왕 때, 율령반포, 불교수용 업그레이드를 진행하였다. 다음 진흥왕 때, 모든 준비를 마쳤고, 이전에 다른 국가가 그랬듯이 전성기를 맞이할 차례가 신라에게도 돌아온것이었다.

백제: 형 아직 안죽었다.

신라가 결혼 동맹한 후, 열심히 업그레이드 할 동안, 백제도 지방에 22담로 파견을 해서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한다는 느낌으로, 급히 도망가느라 천도했던 웅진(공주)를 버리고 사비(부여)로 천도하였으며, 국호도 남부여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방군제(22부, 수도 5부, 지방 5방)으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불교 진흥에 힘을 썼다. 이로써 백제도 다시 강성해졌다.

백제: 그게 죽여달라는 뜻은 아니잖니.

강성해진 신라와, 다시 힘을 되찾은 백제는,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되찾는데 성공 하였다. 한강  상류는 신라가 차지하고,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였다. 근데,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의 한강 하류 마저 뺏아버렸다. 나제동맹은 즉시 깨졌으며,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치르게되었다. 이 결과, 백제왕 성왕이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하게 되었다. 온전히 모든 승을 거둔 신라는 한강유역을 독차지하며,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역시 이전 국가들이 그랬듯 사방팔방으로 영향력을 행사해가며 여기저기 비석을 세우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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